워싱턴에 실망한 김규식, 모스크바로 향하지만…

  • 2025.11.28 05:18
  • 59분전
  • 프레시안
워싱턴에 실망한 김규식, 모스크바로 향하지만…
SUMMARY . . .

이후 10년 가까이(1923-32년) 상하이, 톈진 등에서 교육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이 활기를 되찾자 한중 합작에 의한 독립운동 노선을 추구하며 1933년 두 번째 도미 외교를 벌인다.

미국의 이승만, 서재필이나 국내의 이상재, 송진우 등이 워싱턴회의에서 독립의 계기를 찾으려 했다면 김규식, 여운형은 러시아의 협력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극동민족대회에서는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당시의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아니라 중앙혁명 지도기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후 레닌이 지원한 혁명 자금(40만 루블)을 놓고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임시정부 등이 그야말로 난장판을 벌이면서 1922년 4월에 결국 모든 활동이 중지되고 실패로 끝난다.

김규식이 미국에서 인문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서방식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인데, 극동민족대회에서는 공산당 후보위원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비판하고 러시아를 긍정하는 '대변신'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 출처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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